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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전도를 위한 조언 #1
전도가 필요합니다
길을 지나다 노방전도를 하시는 분이 건네준 물티슈를 하나 건네받았습니다. 종이 전도지는 읽지도 않고 버려지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활용할 수 있는 수단으로 ‘물티슈’를 전도지 대용으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물티슈의 뒷면에는 교회 이름과 예배 시간이 인쇄된 스티커가 붙어있었습니다. 아침 일찍부터 지하철역 근처에서 사람들에게 전도용 물티슈를 건네는 성도들의 수고가 깊은 인상을 준 것과 동시에, 이런 방식의 전도는 어떤 ‘효과’가 있을까, 하는 물음이 떠올랐습니다.
과거에는 전도지를 나눠주기 위해 형식적으로라도 “예수 믿으세요?”라는 질문이 있었고, “예수 믿고 구원받으세요~”라는 덕담(?)도 있었지만, 요즘 나눠주는 기능성 전도용품(물티슈, 휴대용 티슈, 핫팩 등)에는 그런 서사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실용성이 있으니 버리지 않을 것이고, 쓰다 보면 언젠가 뒷면의 스티커 내용을 볼 것이다, 라는 기대도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실용적인 전도지를 통해 단 한 사람이라도 교회를 찾아오거나 신앙을 갖게 된다면 그만한 가치가 있다, 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런데 과연 그런 일이 기대만큼 자주, 그리고 많이 일어날까요?
한편으론 ‘대량 살포형’ 전도 방식이 전도지를 받는 사람들의 기분보다는 전도지를 전해주는 사람들의 열심을 더 충족시키는 모형이 아닌가, 하는 의문도 듭니다. 저 역시도 한 박스의 전도용 물티슈를 다 나눠주고 나면 어떤 뿌듯함을 느끼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건 어디까지나 ‘전도’라는 당위의 의무를 다했다는 만족감이었지 영혼 구원이라는 목표를 완수했다는 기쁨은 아니었습니다. 전도의 목표는 영혼 구원입니다. 교회의 사명 중 하나 역시 전도입니다. 다시 말해 교회의 주요한 사명 중 하나는 “전도를 통해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장에서 느꼈던 저의 고민은 ‘전도지를 건네는 것’이 과연 “영혼 구원”을 위한 가장 적절하고 효율적인 함수를 이루고 있는가, 하는 점이었습니다.
몇 년 전부터 ‘관계 전도’라는 말이 유행했던 저변에는 이런 ‘대량 살포형’ 전도방식이 의미 있는 결과로 이어지지 못했던 이유가 그 배경에 있었습니다. 알파코스, 전도폭발, 오이코스, 119관계전도 등 다양한 관계 전도 프로그램들이 소개되었고 또 많은 교회가 그 프로그램에 동참했습니다.
관계 전도의 가장 큰 특징은 전도의 대상이 ‘특정’된다는 점입니다. 119 관계전도를 강의하는 이효상 목사(교회건강연구원장)는 “하루(1)에 한 명(1)에게 구원(9)의 복음을 전하고, 한 달(1)에 한 명(1)을 구원(9)하자”라는 슬로건으로 관계 전도법을 만들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이처럼 정확한 대상이 있기 때문에 맞춤형 방식이 가능하고, 이로 인해 복음을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입니다. 마치 일반 기업의 ‘판매시점관리’(POS)가 교회 전도에 도입된 것처럼 보입니다.
실제로 관계 전도 방식에는 다양한 ‘마케팅 기법’이 응용되거나 직접 사용되기도 합니다. 분명 이러한 접근이 익명의 대상자들에게 ‘대량 살포’하는 식의 전도 방식보다는 한결 세련되어 보이고, 실제로 그 효과도 이전의 방식보다는 훨씬 구체적으로 보입니다. 10주 혹은 12주의 과정으로 전도 대상자(VIP)를 선정하고 주차별 과제를 수행하면서 VIP에게 교회에 대한 호감도를 높이고 거부감을 줄이게 하는 데 주력합니다. 교회는 정밀한 계획과 준비를 통해 마지막 한 번의 축제를 기민하게 준비합니다. 분명 관계전도는 교회의 진입장벽을 낮추고 전도 프로그램을 ‘대상자’에 초점을 둔다는 측면에서는 큰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론 전도의 ‘미련함’에 대한 아쉬움이 남습니다. 세상에 복음을 전한다는 명목에 오히려 교회가 더 빨리 ‘세속화(secularized)’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근원적인 질문도 남게 됩니다. 솔로몬 행각에서 유대인들을 향해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던 제자 베드로의 일성(一聲)을 다시 회복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고민이 깊어지게 됩니다.
여러 고민에도 불구하고 ‘전도’는 필요합니다. 그것이 교회의 중요한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일부는 전도를 위해서 존재한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전도의 방법과 효과를 고민하고 그 결과에 대해 신학적 고민을 더하는 일은 지난하고 더디지만 결코 멈춰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앞으로 보다 효율적인(이라는 말의 어폐를 느끼지만 다른 대체어를 찾기가 어렵습니다) 전도의 방식을 앞으로 이 지면을 통해 함께 고민하고자 합니다.
editor 구창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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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전도를 위한 조언 #1
전도가 필요합니다
길을 지나다 노방전도를 하시는 분이 건네준 물티슈를 하나 건네받았습니다. 종이 전도지는 읽지도 않고 버려지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활용할 수 있는 수단으로 ‘물티슈’를 전도지 대용으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물티슈의 뒷면에는 교회 이름과 예배 시간이 인쇄된 스티커가 붙어있었습니다. 아침 일찍부터 지하철역 근처에서 사람들에게 전도용 물티슈를 건네는 성도들의 수고가 깊은 인상을 준 것과 동시에, 이런 방식의 전도는 어떤 ‘효과’가 있을까, 하는 물음이 떠올랐습니다.
과거에는 전도지를 나눠주기 위해 형식적으로라도 “예수 믿으세요?”라는 질문이 있었고, “예수 믿고 구원받으세요~”라는 덕담(?)도 있었지만, 요즘 나눠주는 기능성 전도용품(물티슈, 휴대용 티슈, 핫팩 등)에는 그런 서사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실용성이 있으니 버리지 않을 것이고, 쓰다 보면 언젠가 뒷면의 스티커 내용을 볼 것이다, 라는 기대도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실용적인 전도지를 통해 단 한 사람이라도 교회를 찾아오거나 신앙을 갖게 된다면 그만한 가치가 있다, 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런데 과연 그런 일이 기대만큼 자주, 그리고 많이 일어날까요?
한편으론 ‘대량 살포형’ 전도 방식이 전도지를 받는 사람들의 기분보다는 전도지를 전해주는 사람들의 열심을 더 충족시키는 모형이 아닌가, 하는 의문도 듭니다. 저 역시도 한 박스의 전도용 물티슈를 다 나눠주고 나면 어떤 뿌듯함을 느끼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건 어디까지나 ‘전도’라는 당위의 의무를 다했다는 만족감이었지 영혼 구원이라는 목표를 완수했다는 기쁨은 아니었습니다. 전도의 목표는 영혼 구원입니다. 교회의 사명 중 하나 역시 전도입니다. 다시 말해 교회의 주요한 사명 중 하나는 “전도를 통해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장에서 느꼈던 저의 고민은 ‘전도지를 건네는 것’이 과연 “영혼 구원”을 위한 가장 적절하고 효율적인 함수를 이루고 있는가, 하는 점이었습니다.
몇 년 전부터 ‘관계 전도’라는 말이 유행했던 저변에는 이런 ‘대량 살포형’ 전도방식이 의미 있는 결과로 이어지지 못했던 이유가 그 배경에 있었습니다. 알파코스, 전도폭발, 오이코스, 119관계전도 등 다양한 관계 전도 프로그램들이 소개되었고 또 많은 교회가 그 프로그램에 동참했습니다.
관계 전도의 가장 큰 특징은 전도의 대상이 ‘특정’된다는 점입니다. 119 관계전도를 강의하는 이효상 목사(교회건강연구원장)는 “하루(1)에 한 명(1)에게 구원(9)의 복음을 전하고, 한 달(1)에 한 명(1)을 구원(9)하자”라는 슬로건으로 관계 전도법을 만들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이처럼 정확한 대상이 있기 때문에 맞춤형 방식이 가능하고, 이로 인해 복음을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입니다. 마치 일반 기업의 ‘판매시점관리’(POS)가 교회 전도에 도입된 것처럼 보입니다.
실제로 관계 전도 방식에는 다양한 ‘마케팅 기법’이 응용되거나 직접 사용되기도 합니다. 분명 이러한 접근이 익명의 대상자들에게 ‘대량 살포’하는 식의 전도 방식보다는 한결 세련되어 보이고, 실제로 그 효과도 이전의 방식보다는 훨씬 구체적으로 보입니다. 10주 혹은 12주의 과정으로 전도 대상자(VIP)를 선정하고 주차별 과제를 수행하면서 VIP에게 교회에 대한 호감도를 높이고 거부감을 줄이게 하는 데 주력합니다. 교회는 정밀한 계획과 준비를 통해 마지막 한 번의 축제를 기민하게 준비합니다. 분명 관계전도는 교회의 진입장벽을 낮추고 전도 프로그램을 ‘대상자’에 초점을 둔다는 측면에서는 큰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론 전도의 ‘미련함’에 대한 아쉬움이 남습니다. 세상에 복음을 전한다는 명목에 오히려 교회가 더 빨리 ‘세속화(secularized)’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근원적인 질문도 남게 됩니다. 솔로몬 행각에서 유대인들을 향해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던 제자 베드로의 일성(一聲)을 다시 회복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고민이 깊어지게 됩니다.
여러 고민에도 불구하고 ‘전도’는 필요합니다. 그것이 교회의 중요한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일부는 전도를 위해서 존재한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전도의 방법과 효과를 고민하고 그 결과에 대해 신학적 고민을 더하는 일은 지난하고 더디지만 결코 멈춰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앞으로 보다 효율적인(이라는 말의 어폐를 느끼지만 다른 대체어를 찾기가 어렵습니다) 전도의 방식을 앞으로 이 지면을 통해 함께 고민하고자 합니다.
editor 구창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