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전도를 위한 조언 #2
전도가 어려운 이유
오래전 교회학교 사역을 할 때, 초등부의 한 아이가 저에게 물었습니다.
“전도사님, 전도사님은 왜 전도사님이에요?”
뜻밖의 질문에 당황한 저는 “그게 무슨 뜻이야?”라고 아이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아니, 전도사님은 전도를 많이 해서 전도사님이냐구요. 몇 명이나 전도했는데요?”
아이의 해맑은 질문에 뒷머리 어디쯤에서 망치로 한 대 맞은 듯 띵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어색한 웃음으로 대화를 얼버무린 뒤에 아이의 질문을 다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렇구나, ‘전도사’는 전도를 하는 사람이었구나, 전도가 본업인 사람이었구나 하는 뒤늦은 깨달음에 한참을 멍해졌던 기억이 있습니다.
전도가 교회의 사명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대형화될수록 오히려 전도에 대한 갈증은 희미해지는 것만 같습니다. 부교역자들은 주로 교회에 모인 사람들을 대상의 교육이나 행정에 집중하게 되고, 전도는 특정한 부서나 모임의 일이 되곤 합니다. 물론 교회는 총동원주일이나 전도축제, 유명 연예인의 초청 집회처럼 특별한 이벤트로 전도의 기회를 꾸준히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마저도 일회성의 행사, 교인들만의 축제로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금은 가가호호 방문 전도가 거의 불가능하고, 노방 전도 역시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학교 앞에서 하교 시간에 아이들을 만나던 간식 전도가 언젠가부터 학습지 영업사원들과의 총성 없는 출혈 전쟁이 되더니, 지금은 안전상의 이유와 빗발치는 학부모 민원 때문에 학교 앞 포교 활동을 거의 금지당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무슨 계기를 통해서든지 일단 교회의 문턱이라도 넘게 하는 일은 의미가 없다거나 낭비라고 말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전도’라는 단어가 주는 부담이 만만치 않습니다. 과거 교회에서는 분기마다 전도왕을 뽑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한 달에 100명을 전도하시던 권사님도 계셨지요. 그러나 최근엔 ‘전도’라는 말을 꺼내는 것조차 쉽지 않습니다. 어느 목사님께서 ‘전도’가 중요하다는 설교를 하셨는데, 한 성도가 주중에 찾아와서 “회사에서도 실적 압박이 적지 않은데, 교회에서까지 이런 부담을 느껴야 하는 게 힘들다.”고 상담 아닌 상담을 했다고 합니다. 왜 교회의 사명인 전도가 이렇게 부담스럽고 어려운 일이 되었을까요?
존 스토트 목사는 이와 같이 전도를 두려워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나는 네 가지의 주된 이유가 있다고 믿는다. 즉, 말이라도 붙여 보려는 강력한 동기가 없든지,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모르든지, 전도가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는 확신이 없든지, 능력의 근원을 잊어버려서 할 수 있다는 확신이 없든지, 이유는 이 네 가지 중 하나다.”
코로나 팬데믹을 통과하면서 한국교회는 전도라는 가장 큰 무기를 잃었습니다. 연일 계속되던 교회를 향한 공격과 대중의 차가운 시선에 기독교인들은 어깨를 움츠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치 이 사회의 모든 문제가 교회 또는 기독교인들에게 있는 것처럼 주장하는 편협하고 냉소적인 시선에 마음이 얼어붙고 손발이 움츠러드는 일이 반복되었습니다. 가장 큰 피해를 입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독선적인 조직인 것처럼 교회를 몰아세우는 사람들에게 전도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처럼 보였습니다. 스스로 기독교인임을 밝히는 것조차 꺼려지는 상황에서 전도라니 너무 시대착오적인 발상이 아닌가 하는 자기 검열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쩌면 우리가 전도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도 같은 곳에 있지 않을까요?
1세기 사도들이 처했던 신앙의 환경도 우리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기독교인들은 그들이 ‘복음’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배척되었고 ‘예수’를 증거한다는 이유만으로 화형대에 올라야 했습니다. 그보다 더 적대적일 수 없는 상황에서조차 성도들의 ‘전도’는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신앙이 곧 죽음을 의미하던 시대에서조차 말입니다. 시대의 상황에 눌려 교회의 사명을 연기하거나 포기하는 것이야말로 교회를 대적하는 세력들이 바라고 원하던 것이 아닐까요?
문화목회콘텐츠 C:ON은 전도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들이 나눠지는 장(場)을 만들고 싶습니다.
홈페이지의 나눔 게시판이나 오픈채팅을 통해 전도에 대한 여러분들의 다양한 경험도 함께 나눠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세 번째 시리즈로 이어집니다
관계전도를 위한 조언 #2
전도가 어려운 이유
오래전 교회학교 사역을 할 때, 초등부의 한 아이가 저에게 물었습니다.
“전도사님, 전도사님은 왜 전도사님이에요?”
뜻밖의 질문에 당황한 저는 “그게 무슨 뜻이야?”라고 아이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아니, 전도사님은 전도를 많이 해서 전도사님이냐구요. 몇 명이나 전도했는데요?”
아이의 해맑은 질문에 뒷머리 어디쯤에서 망치로 한 대 맞은 듯 띵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어색한 웃음으로 대화를 얼버무린 뒤에 아이의 질문을 다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렇구나, ‘전도사’는 전도를 하는 사람이었구나, 전도가 본업인 사람이었구나 하는 뒤늦은 깨달음에 한참을 멍해졌던 기억이 있습니다.
전도가 교회의 사명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대형화될수록 오히려 전도에 대한 갈증은 희미해지는 것만 같습니다. 부교역자들은 주로 교회에 모인 사람들을 대상의 교육이나 행정에 집중하게 되고, 전도는 특정한 부서나 모임의 일이 되곤 합니다. 물론 교회는 총동원주일이나 전도축제, 유명 연예인의 초청 집회처럼 특별한 이벤트로 전도의 기회를 꾸준히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마저도 일회성의 행사, 교인들만의 축제로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금은 가가호호 방문 전도가 거의 불가능하고, 노방 전도 역시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학교 앞에서 하교 시간에 아이들을 만나던 간식 전도가 언젠가부터 학습지 영업사원들과의 총성 없는 출혈 전쟁이 되더니, 지금은 안전상의 이유와 빗발치는 학부모 민원 때문에 학교 앞 포교 활동을 거의 금지당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무슨 계기를 통해서든지 일단 교회의 문턱이라도 넘게 하는 일은 의미가 없다거나 낭비라고 말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전도’라는 단어가 주는 부담이 만만치 않습니다. 과거 교회에서는 분기마다 전도왕을 뽑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한 달에 100명을 전도하시던 권사님도 계셨지요. 그러나 최근엔 ‘전도’라는 말을 꺼내는 것조차 쉽지 않습니다. 어느 목사님께서 ‘전도’가 중요하다는 설교를 하셨는데, 한 성도가 주중에 찾아와서 “회사에서도 실적 압박이 적지 않은데, 교회에서까지 이런 부담을 느껴야 하는 게 힘들다.”고 상담 아닌 상담을 했다고 합니다. 왜 교회의 사명인 전도가 이렇게 부담스럽고 어려운 일이 되었을까요?
존 스토트 목사는 이와 같이 전도를 두려워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을 통과하면서 한국교회는 전도라는 가장 큰 무기를 잃었습니다. 연일 계속되던 교회를 향한 공격과 대중의 차가운 시선에 기독교인들은 어깨를 움츠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치 이 사회의 모든 문제가 교회 또는 기독교인들에게 있는 것처럼 주장하는 편협하고 냉소적인 시선에 마음이 얼어붙고 손발이 움츠러드는 일이 반복되었습니다. 가장 큰 피해를 입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독선적인 조직인 것처럼 교회를 몰아세우는 사람들에게 전도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처럼 보였습니다. 스스로 기독교인임을 밝히는 것조차 꺼려지는 상황에서 전도라니 너무 시대착오적인 발상이 아닌가 하는 자기 검열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쩌면 우리가 전도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도 같은 곳에 있지 않을까요?
1세기 사도들이 처했던 신앙의 환경도 우리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기독교인들은 그들이 ‘복음’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배척되었고 ‘예수’를 증거한다는 이유만으로 화형대에 올라야 했습니다. 그보다 더 적대적일 수 없는 상황에서조차 성도들의 ‘전도’는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신앙이 곧 죽음을 의미하던 시대에서조차 말입니다. 시대의 상황에 눌려 교회의 사명을 연기하거나 포기하는 것이야말로 교회를 대적하는 세력들이 바라고 원하던 것이 아닐까요?
문화목회콘텐츠 C:ON은 전도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들이 나눠지는 장(場)을 만들고 싶습니다.
홈페이지의 나눔 게시판이나 오픈채팅을 통해 전도에 대한 여러분들의 다양한 경험도 함께 나눠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세 번째 시리즈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