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시절, 우리의 성탄절 풍경은 이랬다.
1880년대부터 2020년대까지 성탄절의 풍경들.
1880년대
1886년 12월 24일에 이화학당에 우리나라 사상 최초로 크리스마스트리가 꾸며졌다. 스크랜튼 선교사의 아내 메리의 솜씨였다. 1887년, 아펜젤러는 아이들을 모아 성탄절을 소개하고 양말에 선물을 담아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아이들은 산타클로스의 선물로 여기며 기뻐했다. 언더우드는 성탄절에 평소 고마웠던 사람들과 교인들을 집으로 초청해 음식을 베풀고 성탄절의 의미를 소개했다. 초기 선교사들이 학교와 교회를 세우면서 그들이 본국에서 지냈던 성탄절 문화가 자연스럽게 우리나라에 스며들어 왔다. 최초의 여성 세례식이 거행된 날도, 한국인을 위한 첫 장로회 성찬식이 예배 중에 베풀어진 날도 성탄절이었다(1887년).
1890년대
1896년 12월 24일자 독립신문에 ‘내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일’이라는 성탄절 소개 기사가 실렸다. 한민족 역사에서 최초로 성탄절을 소개한 언론이 ‘독립신문’이었다. 1897년, 배재학당에서는 성탄에 관한 성극을 공연하고 어린이들에게 선물을 나누어 주었다. 최병헌 목사(훗날 정동교회 2대 목사 역임)는 1896년 12월 24일자 <대한크리스트인회보>에 ‘대한 천지에도 성탄일에 기념하는 정성과 경축하는 풍속이 점점 흥왕할 줄로 믿노라’고 염원을 투고했는데, 1899년 12월에는 그의 소망처럼 ‘서울 성안과 성 밖에 예수교 회당과 천주교 회당에 등불이 휘황하고 여러 천만 사람이 기쁘게 지나가니 구세주 탄일이 한국에도 큰 성일이 되었더라’는 기사가 실렸다. 한국에서 성탄절이 중요한 축일로 정착하였음을 방증한다.

독립신문에 소개된 성탄절 소식
1900년~1910년대
정동감리교회 한석원 목사는 성탄절 성극을 만들고 어린이 잡지를 발간하는 등 성탄 절기 행사를 교회 교육에 적용하고 전파하는 데 앞장섰다. 이러한 노력의 결실로 1900년대에는 기독교인이든 비기독교인이든 성탄절에 교회당으로 몰려드는 풍경을 볼 수 있었다. 특히 조선 민중들은 성탄절에 교회당에서 행해졌던 성탄극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고 기독교의 성탄 행사는 전통적인 명절과는 다른 축일의 성격으로 인식되어 갔다. 1913년경에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4성부로 합창하는 성가대가 결성되었고, 1916년 성탄절에는 정동제일교회에서 이화학당 여학생들이 숙련된 독창과 듀엣, 트리오, 4부 합창 연주와 촛불 퍼포먼스를 선보여 찬탄을 받았다.
1920년대
일제 강점기에 성탄절은 본격적인 상업성을 띠기 시작했다. 조선호텔 대식당에 설치된 크리스마스트리 장식등에 화재가 났다는 기사(1920.12.28 조선일보)로 보아 일반 식당과 카페에서도 트리를 장식하고 성탄절 분위기를 냈던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일본은 기독교인들이 성탄절 이튿날에 교회가 악대와 깃발을 동원해 빈민과 환자들을 위문하는 가두 행렬을 진행하자 혹여 이것이 반일 시위로 번질까 염려해 엄중히 경계하였다. 1924년 성탄절에는 ‘새벽찬송대’가 새벽송을 다녔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1928년에는 구세군 자선냄비가 최초로 모금을 시작했다.
1930년대
서양식 달력 체계인 양력 도입과 개신교의 영향으로 어느덧 성탄절이 동짓날을 대체하게 되어 1930년대부터는 대중의 축제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신문에서 성탄절을 ‘기독교인의 손에서 상인의 손으로 넘어갔다’고 지탄할 정도로 종교적 의미가 퇴색되어 갔으나 중일전쟁(1937년)과 태평양전쟁(1941년) 발발로 인해 상업적이고 향락적인 분위기가 잠시 주춤하게 되었다. 1932년에 크리스마스씰이 최초 발행되었는데 일제에 대한 저항 정신이 담겼다는 이유로 발행이 중단되었다.

1930년대 연말의 명동 풍경
1940년대
1945년 독립 이후, 미군정의 통치하에 12월 25일이 각종 관공서의 휴일로 지정되었고, 정부 수립 이듬해인 1949년에 ‘기독탄생일’이라는 이름의 법정 공휴일이 되었다. 1945년 9월에 포고된 야간통행금지령이 유일하게 해제되는 날이 성탄절이었으니, 이날은 1년 중 몇 번 없는 자유의 날이자 축제의 날이었다. 교회에서는 성탄절에 빈민들을 교회로 초청하여 음식을 대접하고 필요한 물품을 지원하였다. 한편 교회음악의 변화도 활발했다. 서양에서 유입된 찬송가와 번역 성가곡이 교회에 정착되고, 우리나라의 작곡가들이 찬송가와 성가곡 창작을 시작한 시기가 바로 이 무렵이었다.
1950년대
참혹했던 3년 간의 6·25전쟁 동안 한국 사회는 세 번의 성탄절을 보냈다. 전쟁이 한창이던 시기에도 성탄절 예배가 포성이 가득한 국토 곳곳에서 조용히 드려졌고, 군대에서는 이국의 전장에서 성탄절을 맞은 UN군 장병을 위한 위로 행사가 있었다. 종전 이후로 성탄절은 소비와 유흥의 날이 아니라 새로 태어난 어린이들을 향한 기쁨과 축복의 날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50년대 말부터는 한국식 창작 캐럴도 등장하였다. 교회는 성탄절에 국내외 전쟁 난민들과 불우이웃을 초대해 음식을 대접하고 부흥사경회도 활발히 열었으며 어린이 초청 행사도 많이 열었다. 헨델의 오라토리오 <메시아>가 인천 내리교회에서 1954년에 초연되었다.

1950년대 새문안교회 성가대의 크리스마스 새벽송 풍경
1960년대
성탄절이 유흥, 탈선, 음주의 날로 변질되어 가면서 YMCA와 YWCA 등의 단체들이 ‘크리스마스는 가족과 함께’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일탈과 방황 없는 성탄절 보내기 운동’을 벌였다. 1965년에는 덕수교회 장로이자 13대 서울시장이던 윤치영의 주도로 시청 앞에 대형 크리스마스트리가 처음 설치되었다. 1966년 코미디언 서영춘이 최초의 코믹 캐럴송 <징글벨>을 발매했다. 크리스마스씰 모금 캠페인이 활발히 진행되었고, 전국적으로 성탄절 카드에 씰을 붙이는 문화가 형성되었다. 성탄절에 교회에서 모여 캐럴을 부르고 선물 교환을 했으며, 예수님의 탄생을 다룬 드라마나 연극을 교회 무대에 올렸다.

1960년대 명동성당의 성탄 축하 미사

1960년대 성탄절 캠페인
1970년대
이때는 한국 교회가 급속히 성장하던 시기로, 성탄절 예배와 행사가 대규모로 진행되었다. 성탄절 예배에 크리스마스 칸타타 특별 공연을 올리는 교회들이 늘어났다. 클래식 음악과 찬양이 결합된 칸타타는 성탄절의 핵심 행사 중 하나로 자리 잡았는데, 이는 교회 성가대의 역량을 보여주는 중요한 행사였다. 교회학교는 주로 천사와 목자, 마리아와 요셉이 나오는 성탄절 공연 발표회를 하여 인기를 끌었다. 성탄 전야의 밤샘 행사와 새벽송은 여전히 성탄절 문화의 꽃이었다.

1970년대 새벽송 모습(출처 : 동아일보)

1976년 성탄절 불우이웃돕기 행사 모습
1980년대
교회가 대형화하고 교인 수가 급증하면서 성탄절 예배도 더욱 성대하게 이루어졌다. 많은 교회가 성탄절 칸타타를 앞다투어 준비했으며, 성가대는 무려 3~4개월간 칸타타 곡을 연습하고 리허설했다. 전통적인 서양 클래식 음악 외에도 다양한 현대적 음악풍의 칸타타가 등장했고, 대규모 오케스트라가 동원되기도 하였다. 도시화와 생활패턴의 변화, 아파트 거주 문화 확산 등으로 새벽송 전통은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는 성탄절이 단지 교회 행사에 그치지 않고 가정에서도 성탄 트리를 꾸미고 축하하는 가정 축일로 자리매김했다.
1990년대
급속한 기술 발전과 함께 성탄절 행사에서도 미디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게 되었다. 대형 교회에서는 조명, 음향, 스크린 등 다양한 시청각 장비를 활용한 공연을 성탄절에 도입했다. 이 시기에는 CCM이 폭발적으로 인기를 끌면서 청년들이 주도하는 찬양 밴드와 현대적인 예배 형식이 성탄절 행사에 포함되기도 했다. 교회학교 발표회에도 대중문화를 접목하거나 패러디한 콩트 및 연극 등이 무대에 올려졌다. 성탄절 자선 행사를 통해 지역 사회의 빈곤층에 선물을 전달하는 활동 역시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다. 기독교 방송(CBS, 극동방송_들이 성탄절 특집 방송을 대대적으로 방영하여 성탄의 의미를 전했다.
2000년~2010년대
밀레니엄을 통과하면서 통신 기술이 획기적으로 발전한 이 시기에는 교회 행사에 멀티미디어 요소가 본격적으로 도입되었다. 교회학교는 다양한 창작극, 뮤지컬, 현대적인 형식의 성탄 공연을 준비했는데, 교회 내부 인력들이 대본을 창작하고 직접 공연 전반을 제작했던 과거와 달리 이 시기에는 시중에서 판매되는 교회 성탄 콘텐츠를 구매하여 준비하는 방식이 보편화되었다. 한편, 성가대의 성탄절 음악 예배 형태는 눈에 띄는 변화 없이 대체로 음악과 내레이션이 주가 되는 클래식한 스타일을 유지하였다.
2020년대
코로나19 팬데믹이 강타한 2020년 이후 한국 교회는 중요한 전환점을 맞이했다. 사회적으로는 개신교의 사회적 책임과 공공의식이 중요한 화두가 되었으며, 성탄절은 이제 종교적 의미가 완전히 퇴색하여 단지 세속적인 축제일의 하나로 여겨지게 되었다. 온오프라인 병행 예배가 개신교 전체로 확산되었고, 영상이나 음향 기술이 이전보다 훨씬 더 중요해졌다. 잠시 중단됐던 교회학교 성탄 발표회와 성가대의 음악 발표회도 본격적으로 재개되기 시작했으나 아직 예전의 황금기 수준으로 회복된 것은 아니다. 대다수 교회는 풍성한 성탄 예배를 위해 다양한 멀티미디어 콘텐츠를 필요로 하지만, 시장에 존재하는 콘텐츠가 많지 않고 직접 콘텐츠를 기획하고 만들 만한 역량을 갖춘 교회 또한 드물어서 교회 규모에 따른 격차가 존재하는 상황이다.
140년 전 선교사들을 통해 성탄절 문화가 처음 소개되던 그때부터 우리나라 성도들은 한결같은 열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그 의미를 음악과 무대 예술로 기념해 왔다. 시대가 바뀌고 성탄의 풍속도와 문화 예술 매체는 수없이 달라졌어도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이 낮고 천한 땅에 내려오셨다’라는 진리만큼은 변함없이 우리의 영혼을 두드린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이 시대에 가장 어울리는 방식으로 성탄의 영광과 기쁨과 평화를 표현할 길을 모색한다.
문화목회콘텐츠 씨:온도 이러한 성도의 노력에 한 자루의 삽을 보태었다. 씨:온이 제작한 ‘크리스마스 컨템포러리 칸타타 [하늘의 아기]’가 바로 그것이다.
[하늘의 아기]는 성가대가 현대적인 쇼콰이어 형식으로 칸타타를 진행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곡 중 일부를 교회학교와 나누어서 성탄절 연합 공연으로 진행할 수 있는 형태로 기획되었다. 음원은 밴드 반주의 MR과 AR로 제공되었다. 교회 찬양팀이 열정만 있다면 얼마든지 라이브 반주를 시도할 수 있다. 성우가 녹음한 내레이션도 들어 있다. 뮤지컬과 노래극, 연극 대본이 들어있고, 연출가를 위한 상세한 연출노트까지 들어 있다.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운 샌드아트 영상을 비롯해 극 시연 영상과 안무 도해 영상까지 다 있다. 무대 디자인과 소품 도안, 예배를 위한 PPT까지 다 들어 있다. 이 외에도 일일이 거론하기 어려울 만큼 수많은 자료가 제공된다.
[하늘의 아기]만 디렉터 패키지 하나만 구매하면 교회의 미디어 장비 수준과 상관없이 고퀄리티의 성탄 행사를 풍성하게 치를 수 있다. 성가대원과 교회학교는 그저 열심히 모여서 노래와 극을 즐겁게 연습하기만 하면 된다.
성탄절 칸타타 [하늘의 아기]를 통해 교회 안에 다시금 성탄절의 참된 의미가 회복되기를 기대한다. 아울러 성탄절이 연인의 날, 소비와 향락의 날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날임을 모든 사람이 알게 되는 날이 속히 오기를 기도한다.
그 시절, 우리의 성탄절 풍경은 이랬다.
1880년대부터 2020년대까지 성탄절의 풍경들.
1880년대
1886년 12월 24일에 이화학당에 우리나라 사상 최초로 크리스마스트리가 꾸며졌다. 스크랜튼 선교사의 아내 메리의 솜씨였다. 1887년, 아펜젤러는 아이들을 모아 성탄절을 소개하고 양말에 선물을 담아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아이들은 산타클로스의 선물로 여기며 기뻐했다. 언더우드는 성탄절에 평소 고마웠던 사람들과 교인들을 집으로 초청해 음식을 베풀고 성탄절의 의미를 소개했다. 초기 선교사들이 학교와 교회를 세우면서 그들이 본국에서 지냈던 성탄절 문화가 자연스럽게 우리나라에 스며들어 왔다. 최초의 여성 세례식이 거행된 날도, 한국인을 위한 첫 장로회 성찬식이 예배 중에 베풀어진 날도 성탄절이었다(1887년).
1890년대
1896년 12월 24일자 독립신문에 ‘내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일’이라는 성탄절 소개 기사가 실렸다. 한민족 역사에서 최초로 성탄절을 소개한 언론이 ‘독립신문’이었다. 1897년, 배재학당에서는 성탄에 관한 성극을 공연하고 어린이들에게 선물을 나누어 주었다. 최병헌 목사(훗날 정동교회 2대 목사 역임)는 1896년 12월 24일자 <대한크리스트인회보>에 ‘대한 천지에도 성탄일에 기념하는 정성과 경축하는 풍속이 점점 흥왕할 줄로 믿노라’고 염원을 투고했는데, 1899년 12월에는 그의 소망처럼 ‘서울 성안과 성 밖에 예수교 회당과 천주교 회당에 등불이 휘황하고 여러 천만 사람이 기쁘게 지나가니 구세주 탄일이 한국에도 큰 성일이 되었더라’는 기사가 실렸다. 한국에서 성탄절이 중요한 축일로 정착하였음을 방증한다.
독립신문에 소개된 성탄절 소식
1900년~1910년대
정동감리교회 한석원 목사는 성탄절 성극을 만들고 어린이 잡지를 발간하는 등 성탄 절기 행사를 교회 교육에 적용하고 전파하는 데 앞장섰다. 이러한 노력의 결실로 1900년대에는 기독교인이든 비기독교인이든 성탄절에 교회당으로 몰려드는 풍경을 볼 수 있었다. 특히 조선 민중들은 성탄절에 교회당에서 행해졌던 성탄극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고 기독교의 성탄 행사는 전통적인 명절과는 다른 축일의 성격으로 인식되어 갔다. 1913년경에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4성부로 합창하는 성가대가 결성되었고, 1916년 성탄절에는 정동제일교회에서 이화학당 여학생들이 숙련된 독창과 듀엣, 트리오, 4부 합창 연주와 촛불 퍼포먼스를 선보여 찬탄을 받았다.
1920년대
일제 강점기에 성탄절은 본격적인 상업성을 띠기 시작했다. 조선호텔 대식당에 설치된 크리스마스트리 장식등에 화재가 났다는 기사(1920.12.28 조선일보)로 보아 일반 식당과 카페에서도 트리를 장식하고 성탄절 분위기를 냈던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일본은 기독교인들이 성탄절 이튿날에 교회가 악대와 깃발을 동원해 빈민과 환자들을 위문하는 가두 행렬을 진행하자 혹여 이것이 반일 시위로 번질까 염려해 엄중히 경계하였다. 1924년 성탄절에는 ‘새벽찬송대’가 새벽송을 다녔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1928년에는 구세군 자선냄비가 최초로 모금을 시작했다.
1930년대
서양식 달력 체계인 양력 도입과 개신교의 영향으로 어느덧 성탄절이 동짓날을 대체하게 되어 1930년대부터는 대중의 축제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신문에서 성탄절을 ‘기독교인의 손에서 상인의 손으로 넘어갔다’고 지탄할 정도로 종교적 의미가 퇴색되어 갔으나 중일전쟁(1937년)과 태평양전쟁(1941년) 발발로 인해 상업적이고 향락적인 분위기가 잠시 주춤하게 되었다. 1932년에 크리스마스씰이 최초 발행되었는데 일제에 대한 저항 정신이 담겼다는 이유로 발행이 중단되었다.
1930년대 연말의 명동 풍경
1940년대
1945년 독립 이후, 미군정의 통치하에 12월 25일이 각종 관공서의 휴일로 지정되었고, 정부 수립 이듬해인 1949년에 ‘기독탄생일’이라는 이름의 법정 공휴일이 되었다. 1945년 9월에 포고된 야간통행금지령이 유일하게 해제되는 날이 성탄절이었으니, 이날은 1년 중 몇 번 없는 자유의 날이자 축제의 날이었다. 교회에서는 성탄절에 빈민들을 교회로 초청하여 음식을 대접하고 필요한 물품을 지원하였다. 한편 교회음악의 변화도 활발했다. 서양에서 유입된 찬송가와 번역 성가곡이 교회에 정착되고, 우리나라의 작곡가들이 찬송가와 성가곡 창작을 시작한 시기가 바로 이 무렵이었다.
1950년대
참혹했던 3년 간의 6·25전쟁 동안 한국 사회는 세 번의 성탄절을 보냈다. 전쟁이 한창이던 시기에도 성탄절 예배가 포성이 가득한 국토 곳곳에서 조용히 드려졌고, 군대에서는 이국의 전장에서 성탄절을 맞은 UN군 장병을 위한 위로 행사가 있었다. 종전 이후로 성탄절은 소비와 유흥의 날이 아니라 새로 태어난 어린이들을 향한 기쁨과 축복의 날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50년대 말부터는 한국식 창작 캐럴도 등장하였다. 교회는 성탄절에 국내외 전쟁 난민들과 불우이웃을 초대해 음식을 대접하고 부흥사경회도 활발히 열었으며 어린이 초청 행사도 많이 열었다. 헨델의 오라토리오 <메시아>가 인천 내리교회에서 1954년에 초연되었다.
1950년대 새문안교회 성가대의 크리스마스 새벽송 풍경
1960년대
성탄절이 유흥, 탈선, 음주의 날로 변질되어 가면서 YMCA와 YWCA 등의 단체들이 ‘크리스마스는 가족과 함께’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일탈과 방황 없는 성탄절 보내기 운동’을 벌였다. 1965년에는 덕수교회 장로이자 13대 서울시장이던 윤치영의 주도로 시청 앞에 대형 크리스마스트리가 처음 설치되었다. 1966년 코미디언 서영춘이 최초의 코믹 캐럴송 <징글벨>을 발매했다. 크리스마스씰 모금 캠페인이 활발히 진행되었고, 전국적으로 성탄절 카드에 씰을 붙이는 문화가 형성되었다. 성탄절에 교회에서 모여 캐럴을 부르고 선물 교환을 했으며, 예수님의 탄생을 다룬 드라마나 연극을 교회 무대에 올렸다.
1960년대 명동성당의 성탄 축하 미사
1960년대 성탄절 캠페인
1970년대
이때는 한국 교회가 급속히 성장하던 시기로, 성탄절 예배와 행사가 대규모로 진행되었다. 성탄절 예배에 크리스마스 칸타타 특별 공연을 올리는 교회들이 늘어났다. 클래식 음악과 찬양이 결합된 칸타타는 성탄절의 핵심 행사 중 하나로 자리 잡았는데, 이는 교회 성가대의 역량을 보여주는 중요한 행사였다. 교회학교는 주로 천사와 목자, 마리아와 요셉이 나오는 성탄절 공연 발표회를 하여 인기를 끌었다. 성탄 전야의 밤샘 행사와 새벽송은 여전히 성탄절 문화의 꽃이었다.
1970년대 새벽송 모습(출처 : 동아일보)
1976년 성탄절 불우이웃돕기 행사 모습
1980년대
교회가 대형화하고 교인 수가 급증하면서 성탄절 예배도 더욱 성대하게 이루어졌다. 많은 교회가 성탄절 칸타타를 앞다투어 준비했으며, 성가대는 무려 3~4개월간 칸타타 곡을 연습하고 리허설했다. 전통적인 서양 클래식 음악 외에도 다양한 현대적 음악풍의 칸타타가 등장했고, 대규모 오케스트라가 동원되기도 하였다. 도시화와 생활패턴의 변화, 아파트 거주 문화 확산 등으로 새벽송 전통은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는 성탄절이 단지 교회 행사에 그치지 않고 가정에서도 성탄 트리를 꾸미고 축하하는 가정 축일로 자리매김했다.
1990년대
급속한 기술 발전과 함께 성탄절 행사에서도 미디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게 되었다. 대형 교회에서는 조명, 음향, 스크린 등 다양한 시청각 장비를 활용한 공연을 성탄절에 도입했다. 이 시기에는 CCM이 폭발적으로 인기를 끌면서 청년들이 주도하는 찬양 밴드와 현대적인 예배 형식이 성탄절 행사에 포함되기도 했다. 교회학교 발표회에도 대중문화를 접목하거나 패러디한 콩트 및 연극 등이 무대에 올려졌다. 성탄절 자선 행사를 통해 지역 사회의 빈곤층에 선물을 전달하는 활동 역시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다. 기독교 방송(CBS, 극동방송_들이 성탄절 특집 방송을 대대적으로 방영하여 성탄의 의미를 전했다.
2000년~2010년대
밀레니엄을 통과하면서 통신 기술이 획기적으로 발전한 이 시기에는 교회 행사에 멀티미디어 요소가 본격적으로 도입되었다. 교회학교는 다양한 창작극, 뮤지컬, 현대적인 형식의 성탄 공연을 준비했는데, 교회 내부 인력들이 대본을 창작하고 직접 공연 전반을 제작했던 과거와 달리 이 시기에는 시중에서 판매되는 교회 성탄 콘텐츠를 구매하여 준비하는 방식이 보편화되었다. 한편, 성가대의 성탄절 음악 예배 형태는 눈에 띄는 변화 없이 대체로 음악과 내레이션이 주가 되는 클래식한 스타일을 유지하였다.
2020년대
코로나19 팬데믹이 강타한 2020년 이후 한국 교회는 중요한 전환점을 맞이했다. 사회적으로는 개신교의 사회적 책임과 공공의식이 중요한 화두가 되었으며, 성탄절은 이제 종교적 의미가 완전히 퇴색하여 단지 세속적인 축제일의 하나로 여겨지게 되었다. 온오프라인 병행 예배가 개신교 전체로 확산되었고, 영상이나 음향 기술이 이전보다 훨씬 더 중요해졌다. 잠시 중단됐던 교회학교 성탄 발표회와 성가대의 음악 발표회도 본격적으로 재개되기 시작했으나 아직 예전의 황금기 수준으로 회복된 것은 아니다. 대다수 교회는 풍성한 성탄 예배를 위해 다양한 멀티미디어 콘텐츠를 필요로 하지만, 시장에 존재하는 콘텐츠가 많지 않고 직접 콘텐츠를 기획하고 만들 만한 역량을 갖춘 교회 또한 드물어서 교회 규모에 따른 격차가 존재하는 상황이다.
140년 전 선교사들을 통해 성탄절 문화가 처음 소개되던 그때부터 우리나라 성도들은 한결같은 열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그 의미를 음악과 무대 예술로 기념해 왔다. 시대가 바뀌고 성탄의 풍속도와 문화 예술 매체는 수없이 달라졌어도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이 낮고 천한 땅에 내려오셨다’라는 진리만큼은 변함없이 우리의 영혼을 두드린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이 시대에 가장 어울리는 방식으로 성탄의 영광과 기쁨과 평화를 표현할 길을 모색한다.
문화목회콘텐츠 씨:온도 이러한 성도의 노력에 한 자루의 삽을 보태었다. 씨:온이 제작한 ‘크리스마스 컨템포러리 칸타타 [하늘의 아기]’가 바로 그것이다.
[하늘의 아기]는 성가대가 현대적인 쇼콰이어 형식으로 칸타타를 진행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곡 중 일부를 교회학교와 나누어서 성탄절 연합 공연으로 진행할 수 있는 형태로 기획되었다. 음원은 밴드 반주의 MR과 AR로 제공되었다. 교회 찬양팀이 열정만 있다면 얼마든지 라이브 반주를 시도할 수 있다. 성우가 녹음한 내레이션도 들어 있다. 뮤지컬과 노래극, 연극 대본이 들어있고, 연출가를 위한 상세한 연출노트까지 들어 있다.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운 샌드아트 영상을 비롯해 극 시연 영상과 안무 도해 영상까지 다 있다. 무대 디자인과 소품 도안, 예배를 위한 PPT까지 다 들어 있다. 이 외에도 일일이 거론하기 어려울 만큼 수많은 자료가 제공된다.
[하늘의 아기]만 디렉터 패키지 하나만 구매하면 교회의 미디어 장비 수준과 상관없이 고퀄리티의 성탄 행사를 풍성하게 치를 수 있다. 성가대원과 교회학교는 그저 열심히 모여서 노래와 극을 즐겁게 연습하기만 하면 된다.
성탄절 칸타타 [하늘의 아기]를 통해 교회 안에 다시금 성탄절의 참된 의미가 회복되기를 기대한다. 아울러 성탄절이 연인의 날, 소비와 향락의 날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날임을 모든 사람이 알게 되는 날이 속히 오기를 기도한다.